학창 시절 전도사님으로부터 ‘신앙생활 잘해라’라는 권면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신앙을 권면할 때 “신앙 잘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신앙생활 잘해, 신앙생활 똑바로 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닙니다. 이 익숙한 표현 속에는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위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국어학적으로 보면, 신앙은 추상명사입니다. 내면의 태도와 믿음을 가리키는 말이지, 그 자체로는 움직임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진다”라고는 해도 “신앙을 한다”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제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그 뒤에‘생활’이 붙어야 합니다. 신앙은 혼자 설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될 때, 신앙은 비로소 삶 속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신앙을 가졌다면 생활로 신앙을 완성해야 합니다. 

  신앙은 생활입니다. 신앙이 곧 생활이고, 생활이 곧 신앙입니다. 신앙과 생활은 분리될 수 없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신앙이 좋은데 생활이 나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생활이 무너져 있는데 신앙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결국 생활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생활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아직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신앙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배와 기도, 봉사와 친교에 열심인 성도를 보고, “신앙이 좋다”라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교회 밖에서의 삶이 그 모습과 대조될 때, 큰 충격을 받곤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 유효한 종교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은 교회와 세상에서 공통으로 쓰이는 언어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어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신앙이 생활로 연결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에서 명확한 답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데서 그치지 말고, 말씀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태복음 7:24) 예수님은 말씀을 얼마나 들었는지보다 말씀대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강조하셨습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놀라운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 모두 집을 짓는 수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둘 다 말씀을 들었고, 둘 다 열심을 냈습니다. 차이는 단 하나, ‘행함’의 유무였습니다. 신앙의 진면목은 평온한 날이 아닌 비바람이 치는 시련의 때에 드러납니다. 위기 앞에서의 선택, 갈등 속에서의 태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걷는 방향이 그 사람의 진짜 신앙입니다.

  살아내는 신앙이 세상을 바꿉니다.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기독교는 말하는 종교가 아니라 살아내는 신앙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중립이 아닌‘선택적 불순종’입니다. 믿음은 머리와 입술에만 머무를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을 삶으로 증명하십시오. 신앙은 입으로 고백 되지만, 삶으로 확인됩니다. 신앙은 주일에만 작동되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주일의 신앙이 월요일까지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온전한 신앙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떻게 예배하는지보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더 주목하십니다. 무례한 운전자에게 보여주는 양보나 식당 종업원을 향한 따뜻한 인사처럼, 신앙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친절로 완성됩니다. 우리 신앙은 예배당에서 연습되고, 삶의 현장에서 꽃을 피웁니다. 우리 삶이 가장 아름다운 신앙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