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기 직전, 한 남자는 아내와 자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반면 다른 남자는 아내와 자녀가 살아있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감 생활의 첫해가 지나자, 첫 번째 남자는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그의 어깨는 구부러졌고 눈빛은 희미해졌으며, 결국 절망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남자는 꿋꿋이 버텼습니다. 어두운 감방에서도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견뎠습니다. 십 년 후, 그는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현실을 살았지만, 서로 다른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미래가 현재를 지배합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사람은 견딥니다. 우리가 굳건히 서 있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끈을 놓아도, 하나님은 소망의 실을 놓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혼돈 속에 있습니다. 평화보다는 전쟁의 소문이 더 무성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은 관세, 경제, 이민 문제로 뒤숭숭합니다.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 또한 밝지 않습니다. 세상이 온통 회색빛 절망으로 덮여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소망은 역설적(paradoxical)입니다. 만사가 형통하고 평안할 때는 소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힘들고 어두울 때, 우리는 더욱 소망을 노래합니다. 절망의 가장 짙은 밤에도 하나님은 소망의 새벽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 삶에는 소망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불행한 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약은 오직 소망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소망은 어두운 인생길을 환하게 비추는 한 줄기 빛입니다. 고난이 깊을수록 그 빛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소망’입니다.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기대하는 힘입니다. 소망은 우리 가슴에 울림을 줍니다. 우리 삶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엔진입니다. 우리는 소망 때문에 일어나고, 견디고, 다시 도전합니다. 학생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소망으로 공부합니다. 농부는 풍성한 추수를 소망하며 씨를 뿌립니다. 부모는 자녀의 행복을 소망하며 정성껏 돌봅니다. 소망은 절망 위에서도 피어나는 생명의 힘입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 뒤에는 소망이라는 단어가 숨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선택해야 합니다. 소망 없는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의 깊이는 교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소망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살아있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우리의 산 소망(Living Hope)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습니다. (벧전 1:3)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다윗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편 39:7)라고 고백했습니다. 환난이 와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최종적인 승리를 약속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끝날 때까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최후 승리가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소망 없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의 사람으로 살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