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건강염려증”환자가 늘고 있습니다. 의학적으로‘하이퍼컨드리아(hypochondria)’라고 합니다. 조금만 아파도 혹시 큰 병이 생긴 것은 아닌지 염려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염려 전문가가 많습니다. 염려에 일가견이 있어서 틈만 나면 염려합니다. 우리 중에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염려를 갖고 태어납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만 우리 대부분은 내일에 대해 염려하며 삽니다. 평생을 부유하게 살았던 솔로몬도 “인생은 평생 염려하면서 수고하다가 가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염려는 인간됨의 실존이요 참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순간순간 염려했습니다. 염려 없이 일생을 보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염려 속에 살며 안락 속에 죽습니다. 우리는 평생 염려하며 살다 가는 존재가 분명합니다.
물론 염려 자체가 백해무익한 것은 아닙니다. 염려하기 때문에 내일을 위해 더 긴장하고 열심히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염려는 대부분 무익합니다. 미국의 한 대학 연구팀 조사에 의하면, 사람이 하는 염려 중 실제 일어나지 않을 염려는 92%라고 합니다. 진짜로 염려해야 할 것은 8%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8%중에서도 정말로 머리를 싸매고 걱정할 것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염려는 부모의 직무에 포함된 일입니다. 빌 가타드(Bill Gothard)는 “염려는 애초에 전혀 당신의 몫이 아니었던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몫이 아닌 것을 나서서 책임지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셔야 할 염려를 대신해서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빼놓고 계산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염려는 불신앙이며,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행동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낳으면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을 다 책임집니다. 농부는 일을 시키기 위해 사온 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양간을 만들어 줍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택한 자녀의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택한 자녀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처럼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먹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무 한 그루,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광야에서 40년 동안, 2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하루도 빠짐없이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염려해서 하나님께 책망 듣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이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염려는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염려는 어제도 찾아왔고 오늘도 찾아오며 내일도 찾아올 것입니다. 아니 죽을 때까지 우리를 찾아와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한다고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습니다. 염려는 해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고 유익도 없습니다. 염려는 심령을 축내고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물밀 듯 밀려오는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하나님이 우리 모든 필요를 채워주심을 믿으십시오.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고,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입니다. 우리 미래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미리 추측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염려를 떨쳐버림으로써 진정한 평안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