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바나바의 이름이 바울의 이름보다 먼저 등장합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바울의 이름이 바나바의 이름보다 먼저 언급됩니다. 사역의 주도권이 바나바에서 바울에게로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리더십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바울 된 것은 바나바의 보증과 추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 입장에서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나바 입장에서는 체면이 구겨지고 자존심이 상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모든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바울과 경쟁하지 않고, 기꺼이 품어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품격있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품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편안함을 줍니다. 사람이 침대가 아님에도 편안함을 주는 것은 품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품는 만큼 우리의 품격도 올라갑니다.
늘 고만고만한 수준에 머무르고 싶다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거부하면 됩니다. 뒤에서 몰래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면 됩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싶다면 나보다 잘난 사람을 품으면 됩니다. 물은 그릇의 크기만큼 담깁니다. 사람은 그릇만큼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잘 품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사람을 품으려면 사용(포용, 허용, 관용, 수용)을 잘해야 합니다. 사람을 잘 품는 사람이 공동체를 살립니다. 신앙의 동지를 얻는 비결은 사람을 품고 용납함에 있습니다. 평생 함께 동역할 동역자를 얻는 비결도 나보다 나은 사람을 품는 너그러움에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 11:1)라고 권면합니다. 품을 넓혀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받아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잘 받아주고 용납하여 공동체를 더욱 생명력 있게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충성, 봉사, 헌신, 기도 등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성숙한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가정, 교회, 직장에서 가까운 사람과 관계가 좋으면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맞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품이 넉넉합니다. 포용, 허용, 관용, 수용을 잘합니다. 믿음의 동의어가 영접, 수용, 아멘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은 품는 것이 어렵습니다. 거절하고 거부합니다. 포용 대신 비판하고 판단합니다. 관용 대신 정죄합니다. 짜증과 성질을 부립니다. 교회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함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함께하려면 품이 넉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넓은 가슴을 소유한 사람답게 누구라도 품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품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께 나아가면 두 팔을 벌려 꼭 안아주십니다. 예수님의 품이 넓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진노의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양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품을 넓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도 받아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품이 넉넉해서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되십시오.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차가워 가까이할 수 없다면 곤란합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워 함께하고 싶은 사람으로 사십시오. 허물 많은 우리를 받아주신 예수님처럼 품이 넉넉하여 기꺼이 받아주는 품격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